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경 전투 (문단 편집) ==== 몽스 전투 ==== 랑레자크는 동맹군인 영국군이 자신의 왼쪽에서 8월 23일 내내 독일군과 싸우느라 붙들려 있었는데 그 상황을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상브르 강을 랑레자크의 부대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방어했다. 기병사단 1개와 보병사단 1개로 구성된 영국 원정군은 11일 전에 르아브르와 볼로뉴, 루앙에 상륙했고 8월 22일 운하에 도착했다. 8월 23일 아침에 20마일의 전선에서 제2 군단은 서쪽에 더글라스 헤이그 장군이 이끄는 제1 군단은 동쪽에 산개했다. 독일군의 알렉산더 폰클루크가 지휘하는 14개 사단 병력의 제1 군 자체가 북쪽에서부터 영국원정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영국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 경은 랑레자크와 보조를 맞추길 기대했지만 이미 랑레자크가 패배하여 별다른 안내도 없이 도주했다고 보고받자 격분했다. 8월 22일 프랑스 제5 군 사령부로부터 지원요청이 오자 프렌치 경은 24시간 동안 운하를 방어하기로 한다. 그 요청은 사실상 폰클루크의 측면을 공격해 달라는 것이기에 이것은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공세가 가진 측면을 잘못 판단했다는 사례라고 볼수 있는 것이다. [* 왜 그런가 하니 이미 독일군의 측면은 제5 군과 영국 원정군의 근거지를 지나쳐 확장된 상태였다.]어쨌든 영국군은 몽스-콩데 운하를 사수하기로 하고 8월 23일 아침에는 전 구간에서 참호를 파고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산지역 한가운데에서 운하는 방어하기에 아주 훌륭했고 광산 건물은 좋은 방어거점을 제공했고 파낸 흙으로 관측점을 쌓아 지원포대에 진격하는 적의 방향을 알려줄 수 있었다.] 6개사단 대 4개 사단으로 병력에서는 우세한 독일군은 영국군의 방어에 막혀 좀체 진격을 못했다. 10발 탄창을 장착한 영국군의 리엔필드 소총은 독일군의 마우저 소총보다 더 성능이 우수했고 영국군 사수들은 독일군 사수보다 더 우수했다. 영국의 모든 대대가 위치를 사수했고 제48 포대와 108포대의 60파운드 포를 포함한 지원 대포가 지속적으로 지원포격을 가해주었다. 이날 영국의 사상자는 1600명, 독일의 사상자는 5000여명에 육박했다. 독일군은 운하를 도강하기 위해서 다음날에도 공격했지만 고작 진지 하나를 점령하는 데 그쳤다. 영국군은 계속해서 진지를 사수할 생각이었지만 8월 23일 저녁에 프랑스군이 샤를루아에서 패해 퇴각해야 한다는 전갈을 받고 8월 24일에 영국군은 결국 퇴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